2010. 11. 23. 14:44

블랙사바사스는 1976년 6월 마이애미의 Criteria 스튜디오에서 다음 앨범 작업을 시작한다. 사운드의 확장을 위해, Sabotage 앨범에 일부 참여했던 키보디스트 게리 우드러프(Gerry Woodruffe)를 정규 멤버로 영입한다. 1976년 9월 25일 Technical Ecstasy가 발표되었고, 이 앨범은 호평과 혹평을 함께 받는다. 초기의 평가는, 20년 뒤 AllMusic에서 이 앨범에 별두개를 주면서 밴드가 "위험한 수준으로 무너지기 시작함"이라고 언급한 것과 같이 시간이 흐른 뒤에도 더 우호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이 앨범은 이전작에 비해 어둡고 불길한 사운드가 덜해졌고, 신서싸이저의 사용과 빠른 곡이 더욱 늘었다. Technical Ecstasy는 미국에서 탑 50위 진입에 실패했고, 2연속으로 플래티넘 달성에 실패했으며, 1997년에야 뒤늦게 골드를 달성했다. 이 앨범에는 공연에서 자주 연주되는 "Dirty Woman"과 빌의 첫번째 리드 보컬곡인 "It's Alright"가 포함되어 있다. Technical Ecstasy 투어를 미국에서 보스턴과 테드 누전트를 오프닝 밴드로 기용해서 1976년 11월에 시작해서, 유럽에서 AC/DC와 함께 1977년 4월에 마쳤다.

1977년 11월, 다음 앨범을 위한 작업 중, 밴드가 녹음을 시작하기 전날 오지가 밴드를 그만둔다. 오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앨범(Technical Ecstacy)는 날 아주 우울하게 만들었어요. 난 음반 회사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 맥주나 마시다가 녹음하는 식으로 그걸 만들었어요." 플리우드 맥과 사보이 브라운의 전임 보컬이었던 데이브 워커(Dave Walker)가 1977년 10월 작업에 참여하고, 밴드는 새로운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블랙사바스는 워커가 보컬로 참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곡인 "Junior's Eyes"의 초기 버전을 BBC 텔레비젼 프로그램 "Look! Hear!"에서 선보인다.

오지는 Dirty tricks의 이전 멤버였던 John Frazer-Binnie, Terry Horbury와 Andy Bierne로 구성된 솔로 프로젝트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1978년 1월 새 밴드가 연습을 시작했을때, 오지는 마음을 바꿔서 블랙사바스로 돌아왔다. "녹음을 시작하기 3일전에, 오지가 밴드로 돌아오고자 했어요" 아이오미는 말한다.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써놓은 노래를 부르려고 하지 않았고, 이게 작업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어요. 우리는 준비된 노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에서 녹음을 시작해야 했어요. 우리는 아침에 곡을 써서 연습을 하고 밤에 녹음을 했어요.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우리는 곡에 대해서 심사숙고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작업이 정말 힘들었죠. '이게 맞는 거야? 제대로 돌아가는거야?' 그렇게 빨리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함께 조합해내는 작업이 내겐 너무 어려웠어요"



밴드는 캐나다 토론토의 Sounds Interchange 스튜디오에서 5개월을 보내며 Never Say Die!를 녹음한다. "꽤 긴 시간이었죠. 우리는 약을 너무 많이 해서, 말 그대로 약에 절어버렸어요. 우리는 녹음을 하러가야 했고 약을 그만둬야 했죠. 우리는 너무 심하게 약에 취해있어서, 반드시 그만둬야 했어요. 아무도 어떤 것도 정확하게 할 수가 없었고, 우리는 거의 모든 곳에서 각자 다른 연주를 했죠. 그리곤 우리는 돌아가서 잠들어 버렸고, 다음 날 다시 시도를 해보는 식이었죠"라고 아이오미는 회상한다. 이 앨범은 1978년 9월에 발표되어 영국에서 12위, 미국에서 69위를 기록한다. 매체들은 다시 좋지 않은 평가를 했고, 이후에도 평가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뒤 AllMusic의 Eduardo Rivadavia는 다음과 같은 평을 했다. "개인적인 문제와 약물 남용에 의한 밴드의 갈등이 빠짐없이 투영된 산만한 앨범"

1978년 5월에 반헬렌을 오프닝으로 Never Say Die! 투어를 시작한다. 평론가들은 블랙사바스의 공연에 대해 최초로 월드투어에 나선 반헬렌의 젊고 활기찬 공연과 극명한 대조를 보이며 "지치고 영감이 없다"라고 평했다.  1978년 6월 Oden의 Hammersmith 공연을 영상에 담아 후일 Never Say Die DVD를 발매한다. 12월 11일 뉴멕시코의 Albuquerque에서 가진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 블랙사바스에서 오지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투어후, 밴드는 LA로 돌아와 Bel Air에서 집을 빌린 뒤 새로운 앨범 작업을 위해 거의 1년을 보냈다. 음반 회사의 압력과 오지가 내놓는아이디어 부족에 대한 불만으로, 1979년 토니는 오지를 해고하기로 결정한다. 그 당시를 아이오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당시, 오지와는 거의 끝이 나고 있었죠. 우리는 엄청난 약과 엄청나게 많은 코카인, 뭐든 닥치는대로 하고 있었고 오지도 항상 술에 취해 있었어요. 우리는 연습을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오늘 연습? 내일 하자구 내일'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게 정말 나쁜 것이었죠. 항상 뭐든 흐지부지되고 있었죠" 아이오미는 오지와 가까웠던 빌을 통해 오지에게 해고 소식을 전하게 했다. 빌은 그때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프로답게 행동하고 싶었지만, 사실 그렇질 못했어요. 취했을 때 나는 끔찍했고, 나는 진저리를 치고 있었죠. 술은 블랙사바스에 가장 악영향을 미친 거라고 확신해요. 우리는 서로를 파괴시키도록 예정되어져 있었어요. 밴드는 정말 해로왔어요"

Black Sabbath - Dirty Woman

Black Sabbath - It's Alright

Black Sabbath - Junior's Eyes (Dave Walker Vocal)

Black Sabbath - Junior's Eyes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22. 16:52
Volume 4 월드투어 이후, 블랙사바스는 다음 앨범 작업을 위해 LA로 돌아왔다. Volume 4에 만족했기 때문에, 밴드는 녹음 환경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LA의 Record Plant에서 다시 작업을 하고자 했다. 당시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로 인해, Record Plant에서 지난 앨범의 녹음에 사용됐던 방이 거대한 신서싸이져로 교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밴드는 놀라고 말았다. 밴드는 Bel Air(LA 지역의 지명)에 집을 빌려서, 1973년 여름부터 곡을 쓰기 시작했으나 약물 문제와 피로등의 영향으로 인해, 그들은 단 한곡도 완성을 시키지 못했다. 아이오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Volume 4를 작업할 때와는 달리 아이디어가 나오질 않았어요. 모두 내가 뭔가를 내놓기를 바라며 앉아서 기다릴 뿐이었죠.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아무 것도 제시를 못했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런 결과없이 LA에서 한달을 보낸 뒤, 밴드는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Clearwell 성을 빌린다. "우리는 지하감옥에서 작업을 했어요. 그곳은 정말 오싹했지만 어떤 분위기가 있었고, 여러 가지를 상기시겼죠. 그러자 곡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어요" 지하감옥에서 작업하는 동안, 아이오미는 새로운 소재를 음색에 담아 "Sabbath Bloody Sabbath"의 메인 리프를 만든다. 런던의 모건 스튜디오에서 마이크 부처와 녹음을 진행하고, Volume 4에서 시도했던, 신서싸이져와 현악기를 포함하는 새로운 노래와 복잡한 곡구성과 같은 형식적인 변화가 완성되었다. 그룹 YES의 키보디스트인 릭웨이크먼을 세션으로 참가해서 "Sabbra Cadabra"에서 연주를 했다.



1973년 11월, 블랙사바스는 비평가들의 찬사속에 Sabbath Bloody Sabbath를 발표한다. 그들의 경력에서 최초로, 밴드는 롤링스톤즈의 고든 프리쳐가 이 앨범을 "엄청나게 사로잡는 물건", "완벽한 성공작외의 표현이 불가능한 앨범"으로 부른 것과 함께, 주류 언론으로부터 우호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AllMusics의 Eduardo Rivadavia와 같은 오늘날의 평론가들은 "어떤 헤비메탈 콜렉션에도 필수적인, 대작"이며 "기교와 원숙함에서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고 언급한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 5연속 플래티넘 앨범의 판매고를 올리고, 영국에서 4위와 미국에서 11위의 차트 순위를 기록한다.

1974년 1월에 시작한 월드 투어는 1974년 4월 6일, 캘리포니아주 온타리오에서 열린 캘리포니아 잼 페스티발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 20만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블랙사바스는 70년의 록과 팝의 거물인 Deep Purple, Eagles, Emerson, Lake & Palmer, Rare Earth, Seals & Crofts, Black Oak Arkansas, Earth, Wind & Fire와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공연의 일부가 ABC를 통해 TV 중계되어, 더 많은 미국 청중에게 밴드가 알려졌다. 1974년에 밴드는 악명높은 영국인 매니져 돈 앨든과 계약을 맺고, 소속사를 옮긴다. 이 이적은 이전 소속사와 계약상의 분쟁의 원인이 되어, 미국 공연 중 오지는 2년간의 소송의 시발점이 되는 소환장을 받게 된다.



블랙사바스는 1975년 2월, Sabbath Bloody Sabbath와는 완전히 다른 사운드를 단호하게 목표로 삼아 6번째 앨범 작업을 영국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점점 더 테크니컬 해지고(음악적 기계장치에 의존하고), 오케스트라와 우리가 원치않는 모든 것들을 쓰는 것을 계속하거나 반복할 수 없었어요.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았고, 우리는 록 앨범을 만들기를 원했죠. 사실 Sabbath Bloody Sabbath는 록앨범은 아니었으니까" 블랙사바스와 마이크 부처가 프로듀서한 Sabotage는 1975년 7월에 발표되었다. 이 앨범은 다시금 처음부터 롤링스톤즈의 "Sabotage는 Paranoid 이래 최고의 앨범일뿐만 아니라, 그들의 최곡의 작품이 될 것이다"라는 평과 함께 평론가들의 우호적인 평을 받았지만, AllMusic과 같은 오늘날의 평론가들은 "Paranoid와 Volume 4와 같은 앨범을 만들었던 특별한 마법과 같은 화학작용이 붕괴되기 시작했다"라고 평한다. Sabotage는 미국과 영국에서 탑 20위에 도달했으나, 미국에서 플래티넘을 기록하지 못하고 골드만 기록한 첫번째 앨범이 된다. 이 앨범의 유일한 싱글인 "Am I Going Insane (Radio)"가 차트 진입에 실패했지만, Sabotage에는 "Hole in the Sky"와 "Symptom of the Universe"와 같은 팬들이 아끼는 곡이 수록되어 있다. KISS를 오프닝 밴드로 Sabotage 앨범을 위한 투어를 시작했으나, 오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등근육 파열상을 입어 1975년 11월 투어를 조기 중단한다. 1975년 12월, 밴드의 레코딩 회사는 밴드의 의사와 관계없이 히트곡 앨범인 "We Sold Our Soul for Rock 'n' Roll"을 발표했고, 이 앨범은 1976년내내 차트에 있었고, 마침내 미국에서 2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린다.



Black Sabbath - Sabbath Bloody Sabbath

Black Sabbath - Sabbra Cadabra

Black Sabbath - Am I Going Insane (Radio)

Black Sabbath - Hole in the Sky

Black Sabbath - Symptom of the Universe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19. 12:12


1971년 2월, 블랙사바스는 3번째 앨범 작업을 시작한다. Paranoid 앨범의 성공에 힘입어, 밴드는 약물을 구입할 수 있는 충분한 현금과 함께 더 많은 작업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우린 코카인에 엄청나게 빠져들기 시작했어요." 빌은 말한다 "닥치는대로 약물을 썼죠. 그것들은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했고, 약기운이 빠지면 완전히 잊어버렸죠." 1971년 4월에 제작을 완료하고, 미국에서 Paranoid를 발표한지 6개월만인, 7월에 Master of Reality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미국과 영국에서 탑텐에 도달했고, 2달이 못돼서 골드(십만장)를 기록하고 마침내 80년대에는 플래티넘, 21세기초에 더블 플래티넘을 달성한다. Master of Reality는 팬들이 선호하는 "Children of the Grave"와 "Sweet Leaf"와 같은 곡들과 함께 블랙사바스의 첫번째 어쿠스틱곡이 포함되어 있다. 평론가들은 여전히 비우호적이었다. 롤링스톤지의 레스터 뱅스는 Master of Reality를 "천진난만하고, 지나치게 단순하고,지겹게 반복되며,완전히 엉터리인 시(가사)"라고 일축한다. 이후 롤링스톤즈지는 2003년에 시대를 초월한 500개의 앨범중에 298위에 이 앨범을 뽑아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1972년 Master of Reality world tour이후, 블랙사바스는 3년만에 첫 휴식기를 가지게 된다. 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밴드는 심하게 지치고 피곤해 지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수년간 투어와 녹음을 계속하면서 쉬지 않고 달려왔거든요. 전 Master of Reality가 초기의 세 앨범으로 상징되는 시기의 마지막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린 다음 앨범 작업까지 휴식하기로 했죠." 




1972년 6월, 밴드는 LA에서 다시 모여 그들의 다음 앨범 작업을 Record Plant에서 시작했다. 레코딩은 약물 남용의 여파로 힘들게 진행되었다. "Cornucopia"의 녹음이 어렵게 진행되는 동안, 약물만 하고 있던 빌은 밴드에서 거의 해고당할뻔 하기도 한다. 이 앨범은 원래 코카인 남용에 대한 "Snowblind"라는 곡 녹음 후, 이를 타이틀로 불렀으나, 음반 회사는 마지막 순간에 Black Sabbath Vol. 4로 앨범 타이틀을 바꾼다. "Volume 1,2,3도 없는데, 정말 아주 멍청한 타이틀이지"라고 빌은 말한다

블랙사바스의 Volume 4는 1972년 9월에 발표되어, 평론가들의 반복되는 혹평속에서도 한달이 못되어 골드를 달성하고 미국에서 밴드의 4연속 백만장 판매 앨범이 되었다. 앨범 제작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면서, Volume 4에서 현악기와 피아노, 관현악적 기법, 다편성곡과 같은 새로운 조화에 대한 실험을 밴드가 시작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Tomorrow's Dream"이 첫번째 싱글로 발표되었으나 차트 진입에는 실패했다. 대규모의 미국투어 이후, 1973년 최초의 호주 투어를 가지고 이후 유럽 본토에 대한 투어를 한다.


Black Sabbath - Children of the Grave
(오지 탈퇴 소동이 있던 무렵의 영상으로 오지가 무대에서 구석으로 찌그러져 있고, 아이오미가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있음)

Black Sabbath - Sweet Leaf

Black Sabbath - Cornucopia

Black Sabbath - Snowblind

Black Sabbath - Tomorrow's Dream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18. 14:29
블랙사바스는 1969년 12월 필립스 레코드와 계약하고, 그들의 첫번째 싱글인 'Evil Woman'을 필립스 레코드 산하의 폰타나 레코드에서 1970년 1월 발표한다. 이후의 발표곡들은 필립스의 신규 프로그레시브 록 레이블인 버티고(Vertigo) 레코드를 통해 발표된다. 첫번째 싱글의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밴드는 1월 하순경에, 프로듀서 로저 베인과 데뷔 앨범을 이틀간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수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아이오미는 레코딩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우리는 이틀안에 작업을 완료해야 하고, 그중 하루는 믹싱에 할애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레코딩을)라이브로 했죠. 오지는 연주와 동시에 노래를 했고, 우리는 그를 별도의 부스에 넣어 우리와 격리시켰어요. 우리는 대부분의 곡에서 두번 연주할 기회가 없었어요."



밴드와 동명 앨범인 'Black Sabbath'는 1970년 2월 13일의 금요일에 발매가 되었다. 이 앨범은 영국 앨범 순위에서 8위를 기록하고, 1970년 5월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워너 브러더스를 통해 발매가 된다.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1년 이상 남아, 23위까지 순위를 기록한다. 이 앨범이 상업적 성공을 거둠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롤링스톤지의 레스터 뱅스가 "각자의 음악적 경계 곳곳에서 절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약물중독자처럼 비틀거리는 기타와 베이스의 불협화음의 즉흥연주"라고 일축한 것과 같은, 평론가들의 광범위한 혹평을 받는다. 

이러한 혹평속에서도 상당한 수의 앨범이 팔려서, 밴드의 첫번째 메인스트림 노출 기회가 주어졌다. 이 앨범은 미국 음반 산업 협회(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 : RIAA)와 영국 음반 제작사 협회 (British Phonographic Industry : BPI) 양쪽에서 플래티넘(백만장) 판매 기록을 세웠다.

미국 시장에서 성공에 힘입어, 밴드는 'Black Sabbath' 발표 후 넉달만인 1970년 6월부터 재빠르게 녹음을 재개한다. 새 앨범은 초기에는  베트남전을 비판한 노래 "War Pigs"에 따라, War Pigs로 불렸었다. 그러나 베트남전 지지자들의 반발을 두려워한 워너 브러더스는 앨범의 타이틀을 Paranoid로 변경했다. 이 앨범의 첫번째 싱글인 "Paranoid"는 앨범 제작시 마지막으로 작곡되었다. 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앨범에 수록할 충분한 노래가 없었어요. 아이오미가 파라노이드의 릭들을 그냥 연주해 보았고, 그걸로 끝이었죠. 첨부터 끝까지(완성까지) 스무번, 스물다섯번 정도 연주를 했어요" 싱글은 1970년 9월 앨범 발표에 앞서 발매되어 영국 차트에서 4위를 기록, 블랙사바스의 유일한 탑텐 히트곡으로 남게 된다.



블랙사바스는 'Paranoid'의 싱글 힛트에 힘입어 1970년 10월 영국에서 두번째 앨범 Paranoid를 발표한다. 영국에서 Paranoid가 발표되었을 때도, 미국에서는 Black Sabbath 앨범이 여전히 차트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Paranoid의 미국 발표는 1971년 1월로 미뤄지게 된다. 미국 발표후 1971년 3월에 미국 차트 12위를 기록하고, 거의 라디오 방송없이 미국에서 4백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이 앨범은 이 시기의 록 평론가들에게 다시금 혹평을 당했으나, AllMusic의 스티브 휴이와 같은 오늘날의 평론가들에게서는 "록 음악 역사상 어떤 음반보다 헤비메탈의 사운드와 형식을 정립한,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유일한 헤비메탈 음반"이라 언급된다. 이 앨범은 2003년에 롤링스톤지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앨범 500선에서 130위로 뽑혔다. Paranoid의 성공에 힘입어, 1970년 12월에 전미투어가 이루어지고 두번째 싱글 "Iron Man"을 발표하게 된다. "Iron Man"은 싱글 차트 톱 40위 진입에는 실패했으나, 블랙사바스의 가장 대중적인 곡으로 남았으며 1998년 "Psycho Man"전까지 미국 차트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싱글이었다.

Black Sabbath - Evil Woman

Black Sabbath - War Pigs

Black Sabbath - Paranoid

Black Sabbath - Iron Man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17. 15:46
밴드 Mythology가 1968년에 해체함에 따라, 기타리스트 토니 아이오미(이하 아이오미)와 드러머 빌워드(이하 빌)는 버밍엄 애스톤에서 헤비블루스 밴드를 조직하게 된다. Rare Breed라는 밴드에서 함께 활동했던 베이시스트 기저 버틀러(이하 기저)와 보컬리스트 오지 오스본(이하 오지)가 합류한다. 새 밴드는 The Polka Tulk Blues Band로 처음에 이름 지어졌고 슬라이드 기타리스트 지미 필립스와 색소포니스트 앨런 애커 클라크가 참여했었다. 밴드의 이름을 Polka Tulk로 짧게 바꾼 뒤, 다시 Earth라는 이름(오지는 이 이름을 싫어했다고 함)으로 바꾸고 필립스와 클라크를 제외한 4인조로 활동하게 된다. Earth라는 이름으로 밴드가 활동하면서, 노먼 하인즈가 작곡한 "The Rebel", "Song for Jim", "When I Came Down"과 같은 곡으로 몇개의 데모를 제작한다.

1968년 12월, 아이오미는 갑자기 팀을 떠나 제쓰로툴(Jethro Tull)에 가입한다. 아이오미의 제쓰로툴 재적 기간은 짧았으나, 아이오미는 제쓰로툴과 함께 The Rolling Stones Rock and Roll Circus TV show에 출연하기도 했다. 제쓰로툴의 음악성에 만족하지 못한 아이오미는, 1969년 1월 Earth로 복귀한다.

1969년 밴드는 동명의 밴드가 존재하는 함을 알게 되고, 밴드의 이름을 다시 바꾸기로 결정한다. 이 무렵 밴드 연습실 길건너편의 극장에서 Mario Bava가 감독한 보리스 칼로프의 호러영화 Black Sabbath가 상영중이었는데, 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선 것을 보고 기저는 다음과 같은기록을 남겼다. "사람들이 무서운 영화를 보기 위해 돈을 쓰는 게 이상하다". 이를 계기로 오지와 기저는 기저가 자신의 침대 발치에서본 검은 실루엣의 물체에 대한 환영을 가지고, 오컬트 작가 데니스 위틀리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아, "Black Sabbath"라는 곡의 가사를 쓴다.

"Thr Devil's Interval"이라 불리는 삼온음(tritone)을 작곡에 사용한 이 곡의 불길한 곡조와 어두운 가사는 flower power, 포크음악, 히피문화가 지배하는 1960년대 대중음악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밴드의 방향성이 '어둠'을 지향하게 한다. 이 새로운 음악에 영감을 얻은 밴드는 1969년 8월에 밴드의 이름을 Black Sabbath로 개명하고, 호러영화와 같은 음악을 창조하기 위해, 유사한 소재로 곡을 쓰는데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Jethro Tull 재적시 아이오미)

Earth(Black Sabbath) - The Rebel

Earth(Black Sabbath) - When I Came Down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17. 14:44
본 연대기는 위키피디아의 번역 위주로 작성함

사소한 이벤트나 인터뷰등은 삭제할 수도 있으며, 위키피디아의 서술을 압축 요약하여 번역할 수 있음

인물명이나 지명등은 일반적인 우리말 발음으로 옮겨서 쓸 것 임

위키피디아 원문의 출처나 각주등은 대부분의 경우 같이 옮겨지지 않을 것임

당연히 심각한 오역이나 의역이 즐비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을 것임

따라서 더 정확한 내용이 필요할 경우 원문(http://en.wikipedia.org/wiki/Black_Sabbath)을 참고하기 바람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